마다옴: 시련을 넘어 피어난 미소

어둡고 추웠던 긴 밤을 지나, 마침내 따뜻한 아침을 맞이한 한 사람의 눈물과 희망의 기록입니다.

가난 속에서 싹튼 절망과 인형의 온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할머니의 큰 사랑을 받으며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도박과 술에 빠져 폭력을 행사했고, 어머니마저 오만 엔을 쥐여주고 집을 떠났습니다. 전기가 끊겨 선풍기도 못 켜고, 수도가 끊겨 공원 식수대에서 물을 떠 와야 하는 극심한 가난과 방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예쁜 도시락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부러워 복도나 벤치에서 물로 배를 채웠습니다. 하지만 한 친구가 도시락을 나눠주었고, 친구의 어머니는 밥과 옷을 챙겨주시며 따뜻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보답할 길이 없었던 초등학생 마다옴은 할머니가 주신, 자신이 가진 유일하고 가장 소중한 '아기 공룡 인형'을 선물하며 마음을 전했습니다.

"난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빠도 집에 안 들어와. 밥도 못 먹고... 나는 왜 태어났지? 난 뭘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그래서 제일 소중한 게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는 그 인형밖에 없더라고요."

포기하지 않은 학업, 그리고 한국행

중학교 입학식 날, 비싼 교복을 사지 못해 헌 옷을 물려 입으면서도 '나도 남들과 똑같은 옷이 생겼다'며 기뻐했습니다.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화장실 청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중 일하게 된 빵집에서 제빵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빵집 사장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공부의 끈은 놓으면 안 된다"며 배려해 주셨고, 그 덕에 악착같이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다 쓰러져가는 맨션에 산다며?"라고 상처를 주는 부유한 친구의 말에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좋은 선생님들의 지도 덕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만난 한국인 교환학생의 도움으로 한국의 대학교수님과 연이 닿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모은 유학 자금을 아버지가 도박으로 훔쳐 가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졌지만, 사정을 들은 교수님은 "내가 낼 테니 내 집으로 오라"며 흔쾌히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내가 만든 빵을 먹고 오늘 하루 맛있게 먹어서 기쁘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교수님 집에서 1년 동안 살았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그냥 행복했어요. 힘들어도 행복했어요."

외로운 타향살이와 다시 찾아온 희망의 1호점

하지만 아버지의 병원비와 동생 부양을 위해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 공장에서 혹독하게 일해야 했습니다. 타지에서 차별을 견디며 일하던 중, 고기를 정말 좋아하는 자신만 쏙 빼놓고 아주머니들끼리 회식을 간 날에는 뼈저린 서러움을 느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겨울 생일날 기숙사 문까지 잠겨버려, 홀로 눈을 맞으며 벤치에서 초에 불을 붙이고 케이크를 먹으며 반드시 돈을 벌어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년 뒤, 묵묵히 지켜보시던 교수님의 부름과 전폭적인 학비 지원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카페 사장님들을 인터뷰하고 다닌 끝에 대학 창업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마침내 교수님의 지원으로 소중한 첫 빵집을 열게 됩니다. 눈이 오면 눈을 쓸고 낙엽을 쓸며 주변 상인들에게 싹싹하게 인사하던 청년은 어엿한 사장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눈 오는데 그 벤치에서 울면서 먹었어요... 그래도 속으로 '나 진짜 천천히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행복할 거야. 괜찮아' 하면서 혼자 케이크를 먹었어요."

지켜내야 했던 나, 그리고 끊지 못한 혈육의 정

동생은 엇나가 절도를 하고, 코로나 시기로 힘든 와중에도 술값으로 8천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늘 가족에게 얽매여있던 마다옴은 온전한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동생과의 연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가 입원했다는 소식에 이번에야말로 악연을 끊겠다고 마음먹고 병원을 찾았지만, 막상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자 마음이 약해져 결국 지금까지도 조금씩 지원을 해드리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반면, 자녀가 없으셨던 한국의 교수님 부부는 "네가 우리 딸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따뜻한 진심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사랑에 깊이 감동하여, 교수님 부부의 호적에 들어가 당당하게 '엄마, 아빠'라고 부르기 위해 한국 귀화를 결심하게 됩니다.

"제 삶의 주인공은 저잖아요. 근데 제가 안 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 삶의 중심이 제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선택했습니다."

"'너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다' 하실 때마다, '나 엄마 아빠 딸 할 거야'라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게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버튜버 마다옴의 시작과 빛나는 꿈

가장 힘들고 외롭던 시절, 유명 스트리머 '우왁굳'의 방송을 보며 큰 위로와 웃음을 얻었습니다. 시청자로서 힘든 시기를 버텨냈던 그 기억은, 훗날 오디션에 참가해 스스로 방송을 켜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버튜버가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과거를 넘어선 마다옴님의 최종 꿈은, 좋은 사람을 만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훗날 결혼식장에 팬들을 모두 불러 모아 진심 어린 축하를 받으며, "이렇게 단단하고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할 그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때는 내 결혼식장에 팬들 다 불러 모아서 정말 정말 행복한 결혼식을 할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축하받고, 이렇게 단단한 사람, 좋은 가족 만들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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